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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진리에 대하여 (비더교수에게)

因緣 2018. 6. 23. 10:28

진리에 대하여

                                                      

성철큰스님께서 비더 교수에게

 

 

이 편지는 미국의 비더 교수가 한국의 해인사를 방문해 불교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에 대한 성철 스님의 화답이다. 일반 신도들이 3천배를

해야 만날 수 있는 성철 스님 앞에 비더 교수는 많은 질문을 던졌다.

불교의 진리는 어디에 있으며 학승과 수도승의 차이, 대처승과 출가

승려의 차이, 불교에 대한 엄격한 규율 등 동양불교에 대한 깊은 질문을

성철 스님에게 한 것이다.

성철 스님은 이 낯선 이방인의 질문을 앞에 두고 며칠을 고민하다가

답해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셨다. 그리고 200자 원고지에 무려 50매가

넘을 정도의 답을 붓필로 써 내려가셨다.

 

 

--전일 내방하셨을 때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쓸데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의 질문에 대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이렇게 물어주시니 답을 안 할 수 없어, 몇 자 적어 보내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1.

“진리는 언어 문자에 있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진리를 알고자 하면 자기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언어문자 속에서 진리를 알고자 하면 자기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언어문자 속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이는 땅을 파서 하늘을 찾는 것과 같다.

때문에 진리는 영원히 찾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자기 마음을 닦아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불교경전의 근본 입장입니다.

일체의 진리가 자기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경전이 일시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좋은 지도자를 만나서

‘진리는 마음속에’ 란 화두가 이해되면 경전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경전이 불교 입문의 필수 단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진리를 찾는 데 제일 큰 장애물은 언어문자다.

따라서 천만 년 동안 경전 공부하는 것이

하룻동안 마음 닦는 것만 못하다. 경전은 버리고 자기 마음을 닦아라“고

부처님은 항상 훈계하시고, 제자들에게 좌선(坐禪)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전공하는 학승과 좌선에 전념하는

수도승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일자무식한 사람이라도 자기 마음을 깨치면

<팔만대장경>을 모두 외운 사람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지혜의 힘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불교의 생명선은 경전지식이 풍부한 데 있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을 깨치는 데 있습니다.

 

예컨대 지나(支那) 불교사상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6조 혜능대사는 일자무식이었습니다.

그러나 5조 홍인대사는 신수스님과 비교해, 일자무식이었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깨친 혜능에게 법을 전했고,

이렇게 해서 혜능의 법손(法孫)들이 지나불교를 지배하게 된 것은

천하가 다 찬탄하는 법입니다.

경전을 전공하는 자가 없지 않지만 일생을 이것으로 계속한다면

불교의 근본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탈선입니다.

이조 500년 불교사상의 최고 지위에 있는 서산대사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일생 동안 일자무식한 사람으로 지낼지언정

경전을 파는 학승은 되지 않겠다.“

 

2

불교에서는 출가승려와 속세의 신도가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일체를 희생하고 모든 중생을 위해 독신으로 수도하는 자를

승려라 하고 세속에서 각종 생활을 영위하면서

불교는 믿는 사람을 신도라 합니다.

만약 승려로서 대처(帶妻)하게 되면 자연히 가족 중심으로

불교의 대자비 정신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승려의 대처를 엄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승려가 환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환속하게 되면 승려의 자격이 상실되고 신도가 될 뿐입니다.

아무리 세태가 변해간다 해도 자신은 아주 잊어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 대자비를 구현하는 승려만이

불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지요..

승려가 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집착입니다.

이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집착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바로 성욕입니다.

성욕을 끊지 않고서는 성도(成道)할 수 없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는 독신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3.

모든 식물은 적정량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어, 그것만으로

건강유지에 충분하다고 의학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식’이라고 봅니다.

음식물이란 건강유지에 적량이면 그만이지

구미에 따라서 특별히 가공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년간 무염식(無鹽食)을 계속하는 게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4.

기도는 자기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기도가 불필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배격되는 것입니다.

 

5.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 마음속의 부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자기 본심을 덮고 있는 사악(邪惡), 즉 번뇌망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심의 부처를 보려면

이 망념의 요소들을 퇴치해야 합니다.

불문에 들어오는 길에는 4명의 문지기가 있습니다.

그 4명의 문지기는 바로 망념을 분쇄하는 장군들이며

그들의 발 밑에 깔려 있는 인간들은 사악의 실체들입니다.

그러므로 네 문지기의 각 표정들은 사악을 구축할 때의

자비와 위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의 불문(佛門)에 들어오는 사람은

각기 자기 마음속의 문지기로 하여금 자기 마음속의 사악을

항복 받고 본래 부처인 자기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6.

사찰은 국가사회에 정신적 양식을 공급하는 지도자

즉 진리의 사도자를 양성하는 수도장 입니다.

따라서 일반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관광지로 개발할 수 없습니다.

해인사에서 관광개발을 반대하는 이유는

사찰 본래의 사명인 수도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라고 봅니다.

정부가 어떠한 계획을 세웠던 간에 우리는

수도자의 입장에서 끝까지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지나(支那) 

몽골 ·둥베이[東北:滿洲] ·티베트 ·신장[新疆]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어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秦)’의 음 [chi’n]이 전와(轉訛)하여 서방 제국에 치나(Cina) ·틴(Thin)으로 전해졌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더욱이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경전에도 ‘支那’ ‘脂那’ 또는 ‘震旦(치나스타나 즉 支那人이 사는 땅이라는 뜻)’ 등으로 음역(音譯)되고 난 뒤부터는 이 말이 일반화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지나라는 말은 외래어가 틀림없다. 영어의 ‘차이나(China)’, 프랑스어의 ‘신(Chine)’ 등도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다.

출처 : 수미산
글쓴이 : 시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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