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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9-08 17:01:10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김 선생과 필자는 생전에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마다 김 선생은 “이 선생이 최태영 선생의 역사연구결과를 세상에 널리 알려 그의 생전에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한 숭고한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잘못된 우리 역사를 제대로 되돌리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도 사비를 들여 중국과 일본을 자주 답사하며 헌신한 최 선생의 뜻을 여기서 멈출 수 없다 하면서 최 선생의 큰 뜻을 이어 가기를 당부했다. 필자는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고대사에 관심을 둔지 10년도 안 되는 천학비재인 필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최 선생이 타계한지 7년, 김 선생이 타계한지 4개월이 지난 오늘 두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이글을 쓴다. 그러나 글의 내용은 필자의 연구보다 최 선생이 연구한 내용이 주축이다. 우리 역사가 바로 되기를 바라는 충심에서 선생의 당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환국시대 은폐하기 위해 단군신화 만들어내다
일본은 총독부에 ‘조선사편수회’를 두어 이마니시 류(今西 龍)로 하여금 우리나라 역사가 신라부터 시작한다고 왜곡했다. 해방 후 단군조선은 부활했으나 단군조선에서 단군은 신화화 됐다. 필자도 초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왜곡된 역사를 배웠다. 우리 역사가 5천년도 안 되는 역사로 배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철저한 조작이다. 우리 역사는 단군조선 이전에 이미 환국신시시대(桓國神市時代)가 1565년간이나 지속됐다. 이 환국시대 환웅(桓雄)이 데리고 온 무리가 3000명의 군대였다. 우사(雨師)·운사(雲師)·풍백(風伯) 등 행정적 직임을 맡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환웅(桓雄)이 거느렸던 이 3000명은 소규모의 군대가 아니다. 당시의 3천명은 대단한 무리다. 신화적 허구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이 부분을 자꾸 은닉시키고 회피하려 했고, ‘조선사편수회’는 단군조(檀君朝)를 논하며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뺐다. 그것은 일본 역사의 열등감에서 나온 일이었다. 이어 그들은 단군 신화를 만들어 냈다. 단군신화는 단군시대가 아닌 신시시대(神市時代) 환국(桓國)에 있던 이야기다. 단군보다 1500여 년 전 환웅(桓雄)이란 임금들이 환국(桓國)에 있었다는 것인데, 역사가 없어졌기에 그런 신화로 상징된 것이다. 일본은 환국이 아예 없는 것으로 역사날조를 했던 것이다.
어느 나라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는 신화가 있고 그 신화에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는 것이 상식적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는 고조선 개국부터는 분명한 사실이지 결코 신화가 아니다. 실제로 최근 고고학 발굴을 통한 요동의 고조선 지역에서 BC2400년경의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당시 광역국가가 성립할 수 있었다는 충분한 근거다. 황하문명보다 1500~2000년 앞선 요하문명이 있었다는 석학들의 연구결과 발표도 이를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증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아주 일찍 깨어 난 민족이다. 석기시대부터 들어와 요동과 한반도에 제일먼저 정착했던 주인이다. 다만 약 10만 년 전 빙하 등의 영향을 받은 민족 대 이동으로 요동과 한반도 일대에 인간이 거주했다. 그때 어떤 인종들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 뿌리를 찾아서’를 저술한 존 카터 코벨 박사의 한국 상고사와 관련된 학설이 있다. 코벨 박사는 이 책에서 백인종인 코카서스 인종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 종족들이 역사적인 설정 아래 혼합해 한데 뭉치기 전 환국신시시대(桓國神市時代)에는 곰, 호랑이, 태양, 조상 등을 섬기는 여러 부족으로 분열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환웅(桓雄)대에 와서 단군(배달임금)이 나와 환국을 무력 통일하고 서기전 2333년 아사달(지금의 하얼빈)에서 조선이라는 광역국가를 개국했다.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우리민족은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기마민족으로서 실제 존재한 고조선을 통해 동아세아 최초이자 최강의 국가를 건국했던 것이다.
단군은 환웅(桓雄)의 자손으로 단군조선 개조(開祖)
단군은 환웅(桓雄)의 자손으로서 우리민족의 개조(開祖)가 되는 조상이다. 이것이 단군이야기다. 조선사편수회가 조작한 단군신화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불교의 옷을 벗기면 거기에 인간이 나온다. 그를 배달임금이라 한 것은 산위에서 박달나무 있는 지역으로 내려온 때문이다. 박달나무는 시베리아, 한반도 북부 등의 찬데서 자라는 나무이다. 배달은 박달의 이두(吏讀)로, 박천을 배천으로 읽는 것과 같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단군이 개국한 조선을 조선, 단군조선,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치이념도 BC3898년에 반포한다. 나중에 끼어든 기자나 위만조선과 혼동되지 않도록 단군조선, 단군의 손이 살았던 나라로서 고조선이라고 한다. 고조선이란 말이 생긴 것은 신라 이후이다. 고조선이란 이름은 중국의 지리지(地理誌)인 산해경(山海經)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조선의 역사를 일본은 물론 중국도 철저히 위조하고 날조했다. 이에 일본의 역사 왜곡과 함께 중국의 역사왜곡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백제, 고구려 사람들을 끌고 갔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서적들도 빼앗아 가서 우리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한다. 그리고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내세워 자기네가 모든 패권(覇權)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철저히 주변국의 역사를 개조했다. 그러나 산해경(山海經)만은 역사서가 아니라 지리지(地理誌)인데서 기적적으로 개조를 면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조선이야기가 나온다. 산해경(山海經)에서 조선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열양동해 북산 남쪽에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한다. 낙랑군(요동에 있는 낙랑군) 왕검성이 조선 땅이다. 군자의 나라로 서로 사양하고 다투지 않고 훈훈하여 박하지 않다. 음식은 기장을 먹고 짐승도 키워서 먹는다. 의관을 하고 띠를 띠고 검을 찬다.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잘 행하지 않으니 떼를 타고 구이(九夷)의 나라(조선)로 갈까 보다고 했다는 내용도 산해경에 적혀 있다. 당시 조선주변에는 조선이 책봉한 제후국(諸侯國)이 많은데, 한데모여 복종할 때는 제후국이고 저마다 패권을 다툴 때는 열국(列國)이라고 부른다.
단군은 여러 분국(分國) 분봉 왕(分封 王) 수십 명을 모아 회의를 열었고 속현(屬縣) 여러 군데를 순회 방문했다. 그만큼 고조선은 세력이 있는 민족이었다. 고조선 말기에 조선족의 강한 나라로 부여(夫餘)가 한반도 북부에서 5대 단군을 유지해 나갔다. 예맥(濊貊)도 그 근처였다. 한나라도 부여는 정복 못했으며 부여는 고구려로 이어 졌다. 이 같이 단군은 조선의 왕으로 12부족의 수장으로 군림했으며, 그 중심은 요동이었다. 고대에 우리는 중국과 항상 전쟁과 전투의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그 사례로 훙산(紅山, 홍산) 문화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중국은 우리 몰래 비밀로 발해만 인근에서 대규모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했다. 그 유적과 유물은 바로 고조선의 것이다. 이 훙산문화가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1500~2000년 빠르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이 0사실이 드러나자 중국은 중원 중심 론에 타격을 받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중국은 훙산문화를 포함해 자신의 국경 내에 존재하는 문물은 모두 자국의 역사라는 논리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했다. 중국의 역사개조다. 우리는 이 도둑맞는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라는 사람 중에는 연구하지 않고 일제의 왜곡된 한국사와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그대로 신봉하는 학노(學奴)가 있다. 러시아의 학자로 ‘고조선’을 쓴 U.M 푸틴은 이런 상황을 개탄하며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 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 할 수가 없다. 그 만큼 단군 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당신들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중국과 일본은 우리역사를 끊임없이 날조하고 왜곡해 역사가 도둑맞는 판국에 우리네 사람들은 이를 바로 잡을 생각은 뒷전으로 한 채 방관만 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역사를 무시하는 세대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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