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願)이 선정(禪定)을 가져온다!-그 매커니즘은?]
우리가 무슨 수행을 하든 수행에서는 선정(止)과 통찰지(觀)가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한 곳으로 모여 삼매가 일어나고 그런 삼매를 바탕으로 세상의 일체법을 꿰뚫어보는 통찰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삼매, 선정을 위해서 마음을 한군데 붙들어 매는 것을 소연(所緣)이라 하는데, 이것은 선정 출현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음을 한군데로 전일하게 모음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대상과 하나 되는 선정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군데로 마음을 모으는 소연을 유식에서는 작의(作意), 천태에서는 가관(假觀)이라 부르는데, 화두는 선종의 소연이며 불명호는 정토종 염불의 소연이고 진언은 밀종의 소연이 됩니다.
가령 일체의 부처님께 공양하려면, 삼매에 들어가서 신통을 내고, 한 손으로 모든 세계 부처님께 공양하고, 가없는 꽃, 보배 등이 저절로 손에서 나오며, 음악, 음성도 손바닥에서 저절로 나오는 등, 삼매 중에 나오는 공양의 여러 모습이 기술됩니다. 즉 '보현행원 자체가 삼매의 행'인 것입니다. 삼매에 들어가지 않으면 보현행원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명의 삼매가 바로 화엄이며, 불국토이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괴롭고 힘든, 그래서 마침내 떠나야 하고 참아야 하는(堪忍)하는 고통의 '사바세계'로만 알고 있던 이 세계가 사실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 돌아가야할(歸命) '화엄정토'인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화엄경은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라며 '현실이 바로 불국토'임을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
입법계품의 19번째 선지식 대광왕의 경우, 자신이 살고 있는 묘광성이 사실은 보배로 장엄된 곳이지만 중생들 마음의 욕망에 따라 보는 것이 다른데, 가령 마음이 청정하고 선근을 심어 부처님께 공양하고 발심하여 지혜의 길로 나아가는 이는 이 성이 여러 보배로 장엄되었다고 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더러운 줄로 본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차별이 없건만 차별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더럽고 깨끗하고 넓고 좁은 차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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